작성일 : 24-02-01 10:29
철학적 성찰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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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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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수감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이런 체험의 명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과 의지력의 충돌이 어떤 것인지.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도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을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고통을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 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도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 동료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고통과 죄와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기서의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 밑줄 그었던 부분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의 정신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사는 저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삶은 치열한 생존투쟁의 장이고 그곳에는 수많은 고통, 죄, 종국에는 죽음이라는 비극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또 수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인가요?

 

작가는 사랑이라는 가치와 그 가치를 지키려는 인간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각자 자신의 삶 앞에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 필요하다고, 절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그 책임을 지고 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023년 개인변호사로서의 저의 삶도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소중한 이웃을 위해, 아름다운 이 강산,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이 삶 올바르게 감당해 내고 싶습니다.